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황극중(黃克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69ADF9C911B1552X0
자(字)화보(和甫)
생년1552(명종 7)
졸년1603(선조 36)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선(黃瑄)
조부순경(舜卿)
증조부황준원(黃浚源)

[상세내용]

황극중(黃克中)
1552년(명종 7)∼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화보(和甫).

황준원(黃浚源)의 증손으로, 조부는 황순경(黃舜卿)이고, 부친은 언양현감 황선(黃瑄)이며, 이조판서 황림(黃琳)의 조카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이어 1585년(선조 1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예문관봉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594년(선조 27) 경기지방의 어사가 되어 전쟁 중에 기승을 부리고 있던 도적의 심각한 폐해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1598년(선조 31) 상주목사로 재직 당시 병이 매우 심한데도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하던 중 홍진(洪進)의 간언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당시 전쟁의 와중에서 피해가 극심하고 위험지역이던 양남(兩南)지방에 수령들이 부임하기 싫어하던 상황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 염려되어 감히 면직을 청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600년(선조 33)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아 경연학사로 선발되었고, 이후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회적 혼란으로 토적이 성행하던 상황에서 대흥(大興)에 있던 중 불행히도 토적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53세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大東野乘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