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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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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청원(淸源)
호(號)귀암(龜巖)
생년1539(중종 34)
졸년1615(광해군 7)
시대조선중기
본관양천(陽川)
활동분야의료 > 의인
허론(許碖)
조부허곤(許琨)
출신지김포
공신호호종공신(扈從功臣)
공신호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상세내용]

허준(許浚)
1539년(중종 34)∼1615년(광해군 7)(주1)
생몰년
『태평회맹도』에는 출생 연도가 1539년(중종 34년)이라 기록되어 있고,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최립(崔笠)의 『간이집(簡易集)』에서, 자신의 친구 허준이 의주 귀양지에서 돌아올 때 쓴 “내 동갑내기 친구 허준이 의주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에 부쳐”라는 의미의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증송동경 대의 허양평군 환조자의주)』에서 1539년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허준박물관 소장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에는 1537년 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허준의 향년(享年)이 77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1615년에 숨을 거둘 당시 나이가 77세가 되기 위해서는 1539년일 "가능성"이 높다.
.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김포 출신.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許碖)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을 청나라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찬도맥결(纂圖脉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脉訣集成)』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이공기(李公沂)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영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政院)사헌부사간원에서 허준의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관 지위를 받는 것은 지나친 포상이라 하여 여러 차례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으며, 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다음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의서 편집을 명하고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 근무하면서 편집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25권 25책으로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당시의 의학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救急方)』『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任元濬)『창진집(瘡疹集)』『두창집요(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태산요록(胎産要錄)』『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新撰辟瘟方)』 1권과 『벽역신방(辟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강원도 양도에서 온역(瘟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 『벽역신방』은 그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한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陽平君) 정일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받았다. 그런데 당시 의원은 중인 계급의 직종이었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상소에 할 수 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선조가 죽은 뒤 관례에 따라 허준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죄를 받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사후 임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였던 공로로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받았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집필자]

김두종(金斗鍾)
대표명허준(許浚)
준(浚)
봉호양평군(陽平君)
성명허준(許浚)
청원(清源)
구암(龜巖)

명 : "준(浚)"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12-31국립진주박물관 소장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에 수록된 좌목을 참고하여 생년 1546을 1539로 고침.
2011-01-22"명나라 의사(名醫) 안광익과 함께."를 "안광익과 함께"로 수정. 名醫는 명나라 의사가 아니라 "훌륭한 의사"라는 뜻.
2011-01-22출생지에 대해서는 김두종은 본관 양천의 소재지였던 김포로, 이양재는 양천허씨의 집성촌이 있언 파주로 보고 있음.
2011-01-25허준의 이복동생일 가능성이 큰 허징(許澄)의 문과기록과, 양천허씨 족보를 참고하여 부친 이름 허론(許論)을 허론(許碖)으로 고침.
2011-02-26의과 합격을 확인할 수 없어 합격 내용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