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鄭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6B4FFFFB1543X0 |
자(字) | 창진(昌辰) |
시호(諡號) | 충장(忠壯) |
생년 | 1543(중종 38) |
졸년 | 1592(선조 2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하동(河東)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정응정(鄭應禎) |
출신지 | 영암 |
[상세내용]
정운(鄭運)
1543년(중종 38)∼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영암 출신. 훈련참군 정응정(鄭應禎)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휘하에서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뒤 옥포(玉浦)‧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흥양 쌍충사(雙忠祠)에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70년(선조 3)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휘하에서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뒤 옥포(玉浦)‧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흥양 쌍충사(雙忠祠)에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正祖實錄
國朝人物考
壬辰狀草
隱峰全書
正祖實錄
國朝人物考
壬辰狀草
隱峰全書
[집필자]
조성도(趙成都)
성명 : "정운(鄭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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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