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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중(姜淮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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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보(仲父)
호(號)통계(通溪)
생년?(미상)
졸년1421(세종 3)
시대조선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시(姜蓍)
의령남씨(宜寧南氏)
전주최씨(全州崔氏)
묘소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저서『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

[상세내용]

강회중(姜淮仲)
미상∼1421년(세종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부친은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고, 강회백(姜淮伯)의 아우이다. 전처는 의령남씨(宜寧南氏)판사(判事) 남징(南徵)의 딸이고, 후처는 전주최씨(全州崔氏)통정대부(通政大夫) 성주지사(星州知事) 최영(崔寧)의 딸이다.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최영(崔瑩) 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討平)하였고, 1379년(우왕 5)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사사하였고, 순흥군 안종원(安宗源)판후덕부사 윤진(尹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82년(우왕 8) 진사문과에 합격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 1392년 군자윤(軍資尹)이 되었고, 4월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옥사에 연루되어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과 함께 결당 모란(結黨謀亂)하였다는 죄로 본향에 안치되었다.

1398년(태조 7) 4월 궁성을 쌓던 인부들을 왕명보다 먼저 놓아 보낸 죄로 외방에 귀양 보내졌다가, 10월에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 신정을 하례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고, 1417년(태종 17)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가 되었다가 무고죄로 갇혔으며, 1418년(태종 1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한성부윤(漢城府尹)공조참판(工曹參判)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에 사망하여 미두(米豆) 20석이 내려졌다.

저서로 『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고, 묘는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시묘골에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晉州姜氏歷代重要人名事典(姜大熙 편저, 1988)

[집필자]

오윤정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