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군(漢南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B0A8AD70D1457X0 |
이명(異名) | 이어(李𤥽) |
자(字) | 군옥(群玉) |
시호(諡號) | 정도(貞悼) |
생년 | ?(미상) |
졸년 | 1457(세조 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족 |
모 | 혜빈 양씨(惠嬪楊氏) |
처부 | 권격(權格) |
[상세내용]
한남군(漢南君)
미상∼1457년(세조 3). 조선 전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어(𤥽). 자는 군옥(群玉). 세종의 넷째 서자(庶子)이며, 모친은 혜빈 양씨(惠嬪楊氏)이다. 부인은 예빈녹사(禮賓錄事) 권격(權格)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세종이 왕비와 더불어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麽谷)에 행차하였을 때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궁궐의 수비를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한남군에 봉하여졌다.
1450년(문종 즉위) 개성부(開城府)의 상인 건직(乾直)의 가산을 탈취하였다는 명목으로 종부시(宗簿寺)로부터 송사(訟事)를 당하였으나 결국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가 건직이 살아 있을 때 건직에게 재화를 주어 식리(殖利)를 꾀하려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하여 그 책임을 물어 재산을 취하여온 것인데 건직의 아내 고온(古溫)이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승손(李承孫)의 비(婢)였던 까닭에 승손의 사주를 받아 종부시에 고한 사건이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영풍군(永豊君)‧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고, 아산에 이배(移配)되었다.
그뒤 모든 전토(田土)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1457년 10월 배소(配所)인 아산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신원되었다.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1441년(세종 23) 세종이 왕비와 더불어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麽谷)에 행차하였을 때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궁궐의 수비를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한남군에 봉하여졌다.
1450년(문종 즉위) 개성부(開城府)의 상인 건직(乾直)의 가산을 탈취하였다는 명목으로 종부시(宗簿寺)로부터 송사(訟事)를 당하였으나 결국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가 건직이 살아 있을 때 건직에게 재화를 주어 식리(殖利)를 꾀하려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하여 그 책임을 물어 재산을 취하여온 것인데 건직의 아내 고온(古溫)이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승손(李承孫)의 비(婢)였던 까닭에 승손의 사주를 받아 종부시에 고한 사건이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영풍군(永豊君)‧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고, 아산에 이배(移配)되었다.
그뒤 모든 전토(田土)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1457년 10월 배소(配所)인 아산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신원되었다.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燃藜室記述
文宗實錄
世祖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희권(李羲權)
대표명 | 한남군(漢南君) |
봉호 | 한남군(漢南君), 한남군어(漢南君□), 한남군어(漢南君於) |
시호 | 정도(貞悼) |
자 | 군옥(群玉) |
봉호 : "한남군(漢南君)"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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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7-20 | 왕족인 점을 참고하여 본관을 전주로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