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益安大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4C775C548B300D1404X0 |
성명 | 이방의(李芳毅) |
시호(諡號) | 안양(安襄) |
생년 | ?(미상) |
졸년 | 1404(태종 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자 |
모 |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 |
공신호 | 개국공신 |
공신호 | 정사공신(定社功臣) |
[상세내용]
익안대군(益安大君)
미상∼1404(태종4).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의(芳毅).
태조의 셋째아들이고,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방과(芳果: 뒤의 정종)의 아우이며, 방원(芳遠: 뒤의 태종)의 형이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12월에 방원‧방간(芳幹)과 더불어 개국공신 1등에 추록(追錄)되어 200결의 공신전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원을 보좌하여 이해 9월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지고 200결의 공신전을 이미 받았으며, 그달에 익안공으로서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방간은 좌군절제사, 방과는 우군절제사가 되어 정도전일파가 장악했던 병군을 회수하여 세 왕자가 병권을 분장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종친과 훈신(勳臣)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을,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방간은 풍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각각 관장하였다.
1400년 2월에 방간‧박포(朴苞)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대군이 되었으며, 그뒤 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왕자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이 적어 아우 방간과 방원의 왕위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태조의 셋째아들이고,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방과(芳果: 뒤의 정종)의 아우이며, 방원(芳遠: 뒤의 태종)의 형이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익안군(益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12월에 방원‧방간(芳幹)과 더불어 개국공신 1등에 추록(追錄)되어 200결의 공신전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원을 보좌하여 이해 9월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지고 200결의 공신전을 이미 받았으며, 그달에 익안공으로서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방간은 좌군절제사, 방과는 우군절제사가 되어 정도전일파가 장악했던 병군을 회수하여 세 왕자가 병권을 분장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종친과 훈신(勳臣)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을,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방간은 풍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각각 관장하였다.
1400년 2월에 방간‧박포(朴苞)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방간의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직을 사임하여 방원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대군이 되었으며, 그뒤 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왕자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이 적어 아우 방간과 방원의 왕위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國朝寶鑑
璿源系譜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定宗實錄
太宗實錄
國朝寶鑑
璿源系譜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집필자]
한영우(韓永愚)
대표명 | 익안대군(益安大君) |
명 | 방의(芳毅), 방의(芳義) |
봉호 | 마한공(馬韓公), 익안군(益安君), 익안대군(益安大君),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
시호 | 안양(安襄) |
명 : "방의(芳毅)"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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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