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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후(神懿王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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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절비(節妃)
생년1337(충숙왕 후6)
졸년1391(공양왕 3)
시대고려후기
본관안변(安邊)
활동분야왕실 > 비빈
한경(韓卿)
조부한규인(韓珪仁)
증조부한유(韓裕)
출신지함흥 운전리(雲田里)

[상세내용]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년(충숙왕복위 6)∼1391년(공양왕 3). 조선 태조의 정비. 본관은 안변(安邊).

증문하시랑찬성사(贈門下侍郞贊成事) 한유(韓裕)의 증손이고,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한규인(韓珪仁)의 손녀이며,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이다.

1405년(태종 5)에 세운 제릉(齊陵)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천자(天資)가 현숙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하고 발〔正〕라서 일찍이 용연(龍淵)에 빈(嬪)이 되어 왕업을 도와 이루게 하였으며,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을 끝없이 전하니 신이한 공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과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외향인 안변은 산천이 육령(毓靈)한 상서로운 곳인데, 남쪽 수리쯤에 풍류산(風流山)이 있어 신의왕후의 삼조(三祖)가 묻힌 곳이다. 본래 청학산(靑鶴山)이라 하였는데 신의왕후가 태어날 때 풍류지음(風流之音)이 3년이나 끊이지 않았다 하여 풍류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성계(李成桂)에게 시집와서 함흥 운전리(雲田里)에 세거하였으며, 1364년(공민왕 13) 이성계동북면병마사로서 삼선(三善)삼개(三介)의 난을 토평한 공로로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에 오르고, 단성양절익대공신호(端誠亮節翊戴功臣號)를 받게 되어 그는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여졌다.

우왕대에는 포천재벽동(滓甓洞) 전장(田莊)에 거주하였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때 동북면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1391년 정국의 동요에 상심하여 병을 얻어 9월 12일에 55세로 죽으니 해풍군(海豊郡) 치속촌(治粟村)에 장사지냈다. 조선이 개국한 다음 날(태조 1년 7월 17일) 한씨(韓氏)의 시호를 절비(節妃)라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였다.

뒤에 능직(陵直)으로 권무관(權務官) 두 사람을 배정하고 수릉군(守陵軍) 50호를 두었는데 매호에 토지 2결씩을 지급하였다. 능의 동쪽마을에 제궁(齊宮)을 창건하여 이름을 초경사(肖慶寺)라 하고 교종(敎宗)에 속하게 하였으며 전200결을 배속하였다.

1398년 정종이 즉위하자 11월에 절비한씨신의왕후라 추존하고 1408년(태종 8)에는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고 시호를 높였다.

1410년에 태조의 신주에 신의왕후의 신주를 부제(祔祭)하여 종묘에 배향하였다.

1398년 신의왕후의 기신재(忌晨齋)를 장의사(藏義寺)에서 베풀었으며, 3년 뒤에는 새 화상을 인소전(仁昭殿)에 봉안하고 태조가 친히 치제하였다.

1400년에는 신의왕후의 진영을 광명사(廣明寺)로 옮긴 바 있고, 1405년에는 옛 세자전을 인소전으로 삼아 진영을 옮겼다.

그뒤 1410년에는 태조강헌대왕신의왕후의 진영을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였다.

1411년 9월에 신의왕후의 기신재를 흥덕사 에서 베풀었는데, 태조강헌대왕신의왕후의 기신재에는 의정부와 대언사(代言司)가 모두 참여하는 제행의(祭行儀)를 새로 정하여 설행하였다.

1416년 9월에는 세자(세종)로 하여금 흥덕사에 가서 기신에 소향(燒香)하게 하였다. 본래 환조(桓祖)의 구택인 영흥의 본궁(本宮)에는 별도로 태조신의왕후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는데, 1696년(숙종 22)에는 신덕왕후의 삭망제(朔望祭)와 별제(別祭)에는 내수사(內需司)에서 공진물(供進物)을 분급하는 예행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1683년에는 제왕후의 시책(諡冊) 중에 신의왕태후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 태종비)만이 태(太)자가 있어 미편(未便)함이 논의되어 승인순성신의왕후창덕소열(彰德昭烈)원경왕후로 각각 개책(改冊)한 바 있다.

1824년(순조 24)에는 첨지 한철제(韓喆濟)의 소청으로 다음해에 신의왕후의 탄강지인 안변부익위사(安邊府翊衛社)신의왕후 탄강구기비각(誕降舊基碑閣)을 낙성하였다.

신의왕후의 소생으로는 정종태종을 비롯하여 이방우(李芳雨)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이방연(李芳衍) 등의 6남과 경신(慶愼)경선(慶善) 등 두 공주가 있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肅宗實錄
純祖實錄
龍飛御天歌
燃藜室記述
東文選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능호 : "제릉(齊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6上羅拜呼千歲 上不得已卽位先是鄭夢周使坮諌先劾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䓁流遠州將及上時靖安君廬于齊陵聞變馳還用鄭擢計欲使佟豆蘭殺夢周豆蘭曰我公不知之事
紀年便攷v10戰○竄吏曺佐郞洪暹時許沆蔡無擇欲以金祺安老子薦銓郞暹不從見參判許洽語侵金安老沆䓁構捏成獄杖流興陽○謁齊陵厚陵仍幸松京將謁陵遣官祭于長湍坡州高陽三邑鄕放至松京遣官祭于麗太祖陵親行酌獻禮于穆清殿謁陵還詣開城府
紀年便攷v17國子明宗庚戌生字重任號石田又三一堂又潜巖鄭澈門人宣祖庚辰進士少時有高行己無宦情不事科業授司饔參奉再授齊陵參奉皆不起常戴蔽陽子自稱曰平凉子親劑憂煎號髮盡白疾止還黑與權鞞相好鞸坐詩案死後焚棄不出庭外隣翁置酒相
紀年便攷v17徳晦號旅軒鄭逑門人與鄭經世郭再祐從逰少孤力學深於性理宣祖丙子年二十三以才學被薦甲午薦授禮賓叅奉又除 齊陵叅奉不就 仁祖反正屢除憲職歴司業國朝無此職今特爲徵士設也丁卯為嶺南號召使歴承旨吏議大司憲工判官止右叅
紀年便攷v27癸酉十九年康熙三十二年謁 齊陵厚陵還到松都御南門樓慰諭父老設科取士蠲滌公納本府舊籴未捧者及出債各衙門支勑而當責於民間者命蠲滌未豆租
紀年便攷v30争也上歎曰今士大夫分門割戶戈㦸相尋者獨無內愧乎仍令道臣特書四世同居褒奬敦睦八字旌其閭除英俊僉中樞○謁齊陵厚陵仍幸松京駕次坡州路見成渾墓式於轎渡臨津望見李珥花石亭敎曰俄見午溪墓今見先正舊亭如接德容遣官致祭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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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