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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지(鄭彦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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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연부(淵夫)
생년1520(중종 15)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진(鄭振)

[상세내용]

정언지(鄭彦智)
1520년(중종 1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연부(淵夫). 예조좌랑 정진(鄭振)의 아들이며,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의 형이다.

1554년(명종 9) 인정전(仁政殿) 정시(庭試)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받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1년 전적을 시작으로 형조좌랑정언지평을 거쳐, 선조 때에 교리의주목사승지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589년(선조 22)에는 이조참판에 올랐다.

『명종실록』 편찬시에는 교리에 있으면서 기주관으로 활약하였고, 승지 때에는 이이(李珥)와 군자가 이름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논란을 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승지가 되었을 때 사헌부에서는 평소에 명망이 적어 그 직에 마땅하지 않음을 아뢰고 있었다.

그러다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무고로 역적과 친족으로 교분이 두터웠던 인사로 지목되었으며, 양사의 탄핵으로 정언신은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정언지강계로 귀양에 처하여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은 영남권유(權愉)의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1594년 그를 한성부좌윤으로 임명하여 복관시켰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명 : "언지(彦智)"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2汝立掩覆逆狀於是物論奮激至十一月初三日梁千會等始上疏初四日白惟咸上疏論潑等掩護逆賊之狀初七日臺論劾罷彦智彦信等而上猶不罪十一日賊姪鄭緝招引潑洁潑之弟惟讓彦智彦信洪宗祿上乃親鞫止遠竄十二月十二日安樂校生宣弘
震史記略v2書禮謂予無目乎下大政院曰未知某書至曰悠悠時事欲陳支離又有可笑等語身爲大臣乃敢面慢予不勝痛憤兩司合計潑彦智遠竄彦信中道付處仍宣仁福安就岳校生服論死招潑浩惟讓再鞠杖斃潑母八十穉子七歲幷死杖下惟讓與汝立書多不道
寒臯觀外史v67彦智字淵夫東萊人官吏参
寒臯觀外史v67結爲死友推薦於朝至厠玉堂於是白惟讓等從而交譽此數三子目之爲東之北及是禍作李潑兄弟白惟讓斃於杖下鄭彦信彦智兄弟以同姓之親皆竄西北彦信至於廷鞫刑訊竟死於甲山謫所時李山海爲首相鄭澈爲左相沈守慶爲右相俞泓崔滉金命
寒臯觀外史v67景㴠號東巌光州人官吏議洁字景淵潑之弟也號南溪官典翰惟讓字仲謙水原人官吏議彦信字立夫號懶庵東萊人官右相彦智字淵夫彦信之兄也官吏参泓字正叔號松塘杞溪人官右相諡忠穆守慶字希安號聼天堂豊山人官右相增字可謙號必厓韓
完山誌(全羅北道)v1彦智弟官至右議政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