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저(金䃴)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E40C800FFFFB1512X0 |
자(字) | 학광(學光) |
시호(諡號) | 충민(忠愍) |
생년 | 1512(중종 7) |
졸년 | 1547(명종 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세필(金世弼)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저(金䃴)
1512년(중종 7)∼1547년(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학광(學光).
부친은 이조참판 김세필(金世弼)이다.
1539년(중종 34)에 유학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뒤 검열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지평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 3)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부친은 이조참판 김세필(金世弼)이다.
1539년(중종 34)에 유학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뒤 검열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지평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 3)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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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