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철(金光轍){2}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D11CCA0B1493X0 |
자(字) | 자유(子由) |
생년 | 1493(성종 24) |
졸년 | 1550(명종 5)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강릉(江陵)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세훈(金世勳)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광철(金光轍)
1493년(성종 24)∼1550년(명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유(子由).
부친은 김세훈(金世勳)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밀양현감으로 있을 때 형벌을 남용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530년 군자감첨정이 되고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1532년 사송(司訟)이 바르지 못하고 지체되는 일이 많음을 지적하여 바르게 고칠 것을 주장하고, 곧 집의가 되었다.
1533년 판교‧동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승지‧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35년 장례원판결사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7년 병조참지가 되었다. 곧, 찰리사에 천거되었으나 이 직책은 호조에 해당하는 관직이라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인물됨이 용렬하고 공론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2년 안동부사로 흉년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검소함을 강조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으므로, 이 공으로 포상을 받고 자급(資給)을 올려받아 가의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고 1545년(인종 1) 종부시제조가 되었다. 예조참판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양하니 왕이 불러 흉년과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해줄 것을 특별히 요구하였다.
154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가 고부군수 김응두(金應斗)와 태인현감 신잠(申潛)이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거두는 등, 그 지방 백성들의 부담을 적게하는 데 힘써 선정을 남긴 것을 왕에게 보고하여 이들을 상주하게 하였다.
부친은 김세훈(金世勳)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밀양현감으로 있을 때 형벌을 남용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530년 군자감첨정이 되고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1532년 사송(司訟)이 바르지 못하고 지체되는 일이 많음을 지적하여 바르게 고칠 것을 주장하고, 곧 집의가 되었다.
1533년 판교‧동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승지‧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35년 장례원판결사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7년 병조참지가 되었다. 곧, 찰리사에 천거되었으나 이 직책은 호조에 해당하는 관직이라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인물됨이 용렬하고 공론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2년 안동부사로 흉년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검소함을 강조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으므로, 이 공으로 포상을 받고 자급(資給)을 올려받아 가의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고 1545년(인종 1) 종부시제조가 되었다. 예조참판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양하니 왕이 불러 흉년과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해줄 것을 특별히 요구하였다.
154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가 고부군수 김응두(金應斗)와 태인현감 신잠(申潛)이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거두는 등, 그 지방 백성들의 부담을 적게하는 데 힘써 선정을 남긴 것을 왕에게 보고하여 이들을 상주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明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집필자]
한희숙(韓嬉淑)
대표명 | 김광철(金光轍){2} |
성명 | 김광철(金光轍) |
성명 : "김광철(金光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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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