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잠(申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2E0C7A0FFFFB1491X0 |
자(字) | 원량(元亮) |
호(號) | 아차산인(峨嵯山人) |
생년 | 1491(성종 22) |
졸년 | 1554(명종 9)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고령(高靈) |
활동분야 | 미술 > 화가 |
부 | 신종호(申從護) |
증조부 | 신숙주(申叔舟)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신잠(申潛)
1491년(성종 22)∼1554년(명종 9). 조선 중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그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탐매도(探梅圖)」와 「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그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탐매도(探梅圖)」와 「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槿域書畵徵(吳世 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槿域書畵徵(吳世 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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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