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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량(蘇世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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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우(元佑)
호(號)병암(屛巖)
생년1476(성종 7)
졸년1528(중종 23)
시대조선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소자파(蘇自坡)
저서『병암집(屛巖集)』

[상세내용]

소세량(蘇世良)
1476년(성종 7)∼1528년(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부친은 의빈부도사 소자파(蘇自坡)이며,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小說)‧불경(佛經)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조필(操筆)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臺諫)‧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뒤 홍문관수찬, 지평장령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좌부승지(左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격무(激務)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屛巖集)』 1권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성명 : "소세량(蘇世良)"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郯述v04蘇世良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