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金瑛){1}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E40C601FFFFB1475X0 |
자(字) | 영지(英之) |
호(號) | 삼당(三塘) |
생년 | 1475(성종 6) |
졸년 | 1528(중종 2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안동(安東[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영수(金英銖) |
저서 | 『삼당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영(金瑛)
1475년(성종 6)∼1528년(중종 2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본관은 안동(安東[新]).
장령 김영수(金英銖)의 아들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에는 대교에 올라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등과 더불어 사신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빚어졌던 무오사화의 피화인(被禍人)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그뒤 수찬‧정언‧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 청요직을 지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었다가 곧 김제군수로 외직에 나갔다.
1522년에는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527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곧 개체되었다. 조광조 등 중종 때의 사림파와 언로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등 정치적 성격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문집으로 『삼당집』이 있다.
장령 김영수(金英銖)의 아들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에는 대교에 올라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등과 더불어 사신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빚어졌던 무오사화의 피화인(被禍人)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그뒤 수찬‧정언‧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 청요직을 지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었다가 곧 김제군수로 외직에 나갔다.
1522년에는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527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곧 개체되었다. 조광조 등 중종 때의 사림파와 언로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등 정치적 성격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문집으로 『삼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大東韻府群玉
國朝文科榜目
大東韻府群玉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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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