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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任熙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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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여(敬輿)
호(號)물암(勿菴)
생년1472(성종 3)
졸년1504(연산군 10)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천(豊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임사홍(任士洪)

[상세내용]

임희재(任熙載)
1472년(성종 3)∼1504년(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홍문관에 들어간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사림이 탄핵을 받게 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강백진(康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과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하고 세상의 일을 비평하였다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천리 밖으로 귀양갔었다.

일찍이 시 한 절구를 병풍에 썼는데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한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가?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라고 하였다.

어느날 연산군이 사홍의 집에 들렀다가 그가 이 시를 쓴 것을 알게 되어 화를 당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으며, 경기도 여주의 「임호문공원준신도비(任胡文公元濬神道碑)」와 양주의 「성판서건묘비(成判書健墓碑)」 등이 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海東野言
燃藜室記述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