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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윤(韓亨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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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신경(信卿)
시호(諡號)효헌(孝憲)
생년1470(성종 1)
졸년1532(중종 27)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절(韓岊)
조부한계미(韓繼美)
외조부성준(成俊)

[상세내용]

한형윤(韓亨允)
1470년(성종 1)∼1532년(중종 2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경(信卿).

영중추부사 한계미(韓繼美)의 손자로,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한절(韓岊)의 아들이며, 모친은 성준(成俊)의 딸이다.

출생 3개월 만에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고, 무예에도 능하여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그뒤 1493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고, 그해 겨울에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 1497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정랑기주관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지제교춘추관편수관홍문관부교리경연시강관을 거쳐 함경도어사가 되었다가 곧 진도로 내려가 왜구를 막지 못한 병사를 문책하고 돌아왔다.

1499년 경기도경상도어사가 되어 십포(十浦)의 불법사(不法事)를 다스렸다.

1503년 이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전라도 만경에 유배되었다. 왕의 실덕을 간하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지에서 잡혀왔으나 주동자가 아님이 밝혀져 문외거주(門外居住)의 처분을 받았다가 이듬해 다시 투옥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해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한성부좌윤, 경상도경기도관찰사, 특진관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서예에 능한 당대의 명필가였다.

작품으로 「황보인묘비문(皇甫仁墓碑文)」‧「성준묘비문(成俊墓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朝鮮金石總覽
槿域書畵徵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