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준(任元濬){2}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C6D0C900B1423X0 |
자(字) | 자심(子深) |
호(號) | 사우당(四友堂) |
시호(諡號) | 호문(胡文) |
생년 | 1423(세종 5) |
졸년 | 1500(연산군 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증조부 | 임군보(任君輔) |
공신호 | 좌리공신(佐理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원준(任元濬)
1423년(세종 5)∼1500년(연산군 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
고려 밀직사판사 임군보(任君輔)의 증손이다.
10세에 글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1445년(세종 27) 세종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농장에 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교리가 되었다. 다음해 중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장령‧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오르고,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 좌‧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3등이 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풍수‧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貪邪)하며, 그의 아들 임사홍(任士洪), 손자 임숭재(任崇載)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호문(胡文)이다.
고려 밀직사판사 임군보(任君輔)의 증손이다.
10세에 글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1445년(세종 27) 세종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농장에 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교리가 되었다. 다음해 중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장령‧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오르고,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 좌‧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3등이 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풍수‧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貪邪)하며, 그의 아들 임사홍(任士洪), 손자 임숭재(任崇載)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호문(胡文)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집필자]
이재룡(李載龒)
명 : "원준(元濬)"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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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