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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문(南秀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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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소(景素)
호(號)경재(敬齋)
생년1408(태종 8)
졸년1442(세종 24)
시대조선전기
본관고성(固城)
활동분야문학 > 문인
남금(南琴)
저서『경재유고』

[상세내용]

남수문(南秀文)
1408년(태종 8)∼1442년(세종 24). 조선 초기의 문인.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경질(景質)경소(景素), 호는 경재(敬齋). 병조참판 남금(南琴)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뒤 1426년에 집현전에 들어가서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3년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도 참여하여,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하였다.

1436년 문과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장감박의(將鑑博義)』를 편찬하자 그 발문을 썼고, 이듬해 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를 내자 발문을 썼다.

그뒤 예문관응교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몇 편의 전(箋)‧기‧묘지 등이 『동문선』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다.

또한,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敬齋遺稿
東文選
燃藜室記述
國朝名臣錄

[집필자]

김구진(金九鎭)

명 : "수문(秀文)"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0南世周固城人益文子秀文從子字仁文號松坡成宗丁未以進士登别試歴翰林官止典翰作綱常策文居第一燕山荒淫直諫被罪及反正為舊君守節稱
紀年便攷v14守胡人冒死來居自江界入來之路甚狹僅容一足上有絶壁下有深川名虛空橋前節度使金徳龍敗於此朝廷欲灑其恥乃以秀文代之秀文宿将有威望銳意殱滅
紀年便攷v14死來居自江界入來之路甚狹僅容一足上有絶壁下有深川名虛空橋前節度使金徳龍敗於此朝廷欲灑其恥乃以秀文代之秀文宿将有威望銳意殱滅
大東彙纂v15文者之無其人牧隱逝而陽村主之陽村逝而春亭主之春亭逝而尹大提學主之提學逝而權止齋主之止齋若逝南秀文主之秀文若逝我亦在我逝將軍亦在何患採之早沒乎其論文章日就卑下之意隱然言表筆苑雜記徐四佳居正秉文衡二十三年取士
文獻攷略v8文者之無其人牧隱逝而陽村主之陽村逝而春亭主之春亭逝而尹大提學主之尹逝而權止齋主之止齋若逝南秀文必主之秀文若逝我亦在我逝將軍亦在何患採之早沒乎其論文章日就卑下之意隱然言表筆苑雜記
國朝人物志v1文章名世早歿將軍金自雄深惜之舍人朴以昌曰子無患主文者之無其人權止齋若逝南秀文主之秀文若逝我亦在我逝將軍亦在何患採之早歿乎其論文章日卑之意隱然言表大東韻玉
國朝人物志v1字景質固城人父琴官至吏曹參判娶司正廣州安守之女生秀文聰明強記世宗丙午生員文科丙辰重試壯元以文名世高麗史初草大抵皆出其手官至集賢殿直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