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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비(寧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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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본관동주(東州)
활동분야왕실 > 비빈
최영(崔瑩)

[상세내용]

영비(寧妃)
생졸년 미상. 고려 제32대 우왕의 제2비. 본관은 동주(東州). 철원사람이며, 문하시중 최영(崔瑩)의 딸이다.

우왕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시기는 1388년(우왕 14) 3월이었는데, 이때는 최영우왕을 옹립한 이인임(李仁任)과 그 일파를 점차적으로 정계에서 축출하고 명실상부한 일인집권체제를 구축하여 문하시중직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왕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최영은 그 딸이 정실소생이 아니어서 왕비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설득에 못이겨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후 우왕최영의 집에 자주 내왕하게 되었는데, 이는 우왕최영과의 소원하였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영비의 혼인생활은 오래 가지못하였다.

3개월 후인 같은해 6월에 이성계(李成桂)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을 감금,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우왕강화도로 유배될 때 영비는 같이 따라갔고,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은 폐서인이 되고 곧이어 처형됨으로써 영비의 위치 또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왕창왕신돈(辛旽)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왕비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고려시대의 后妃(정용숙, 民音社, 1992)
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집필자]

정용숙(鄭容淑)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