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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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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이보자(李甫刺)
생년?(미상)
졸년1411(태종 11)
시대고려후기
본관덕산(德山)
활동분야관료
이영(李英)

[상세내용]

이조(李慥)
미상∼1411년(태종 11). 본관은 덕산(德山). 초명은 이보자(李甫刺).

고려판도판서(版圖判書) 이영(李英)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1390) 경오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천성이 질박하고 곧아, 조선개국 후 낙향하여 은둔하고 있었으나,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하륜(河崙)의 천거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태조 2년(1393) 좌습유(左拾遺)로 있을 때, 세자빈(世子嬪) 유씨(柳氏)와 내시 이만(李萬) 사건의 전모를 밝히라는 상언(上言)을 한 죄로, 각산(角山)에 유배되었다. 태조 7년(1398) 응교(應敎)를 거쳐 이조의랑(吏曹佐郞)으로 있을 때, 직첩(職牒)과 전민(田民: 전지와 백성)을 빼앗기고, 덕흥진(德興鎭)에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 유례상정소(儒禮詳定所)를 설치했을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0년(태종 10)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세종(世宗)의 사부이기도 하다.

아들 이익박(李益朴)황희(黃喜) 문하에서 수학한 청백리였으며, 문장과 학행도 일세의 스승이라 할 정도로 뛰어났다. 관직은 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를 지냈다.

[참고문헌]

富川族譜專門圖書館(http://www.jokbo.re.kr)
朝鮮王朝實錄
충청남도 사이버문화원「조선전기의 사회경제와 예산-2」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