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신(鄭可臣)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AC00C2E0D1298X0 |
초명(初名) | 정흥(鄭興) |
자(字) | 헌지(獻之) |
시호(諡號) | 문정(文靖) |
생년 | ?(미상) |
졸년 | 1298(충렬왕 24)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송수(鄭松壽) |
[상세내용]
정가신(鄭可臣)
미상∼1298년(충렬왕 24). 고려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정흥(鄭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여러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그 스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으로 하여금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郞舍)와 금내6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하여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게 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 만에 한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며,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을 더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 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大官)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書生)과 같았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 고려 태조의 조상)으로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金鏡錄)』을 찬집하였고, 그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여러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그 스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으로 하여금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郞舍)와 금내6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하여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게 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 만에 한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며,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을 더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 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大官)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書生)과 같았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 고려 태조의 조상)으로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金鏡錄)』을 찬집하였고, 그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강진철(姜晉哲)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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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