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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林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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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질(元質)
생년?(미상)
졸년1376(우왕 2)
시대고려후기
본관길안(吉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임박(林樸)
미상∼1376년(우왕 2). 고려의 문신. 본관은 길안(吉安). 자는 원질(元質).

1360년(공민왕 9) 등제하여 개성참군(開城參軍)이 되고,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자 병법에 밝아 원수 김득배(金得培)의 막하로 활약하였다. 공민왕이 남천(南遷)하였을 때 역사책과 전교제향(典校祭享)의 의범(儀範) 등을 땅에 묻었다가 적을 평정한 뒤 발굴함으로써 그 일부를 보존하게 되었다.

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당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이 왕위를 탐내어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고려왕이 홍건적에게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순제는 덕흥군으로 왕을 삼고자 하였다. 이에 이공수와 더불어 왕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덕흥군파의 협박과 유혹을 끝내 물리쳤다. 다음해 귀국하자 그 공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라 정심론상(正心論相) 20개조를 상소하였다.

그뒤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어서는 왕의 명령으로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한 10여가지 사항을 진술하고, 이로 인해 왕의 신망을 얻어 전의령(典儀令)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하남왕(河南王)의 사자 곽영석(郭永錫)이 왔을 때는 관반(館伴)으로 나아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

1367년 제주선무사로 나갔다가 이전 관리들과는 달리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어 성균좨주에 전직하여 성균관을 오경사서(五經四書)의 재(齋)로 나누고, 과거는 중국의 수검통고법(搜檢通考法)을 따르도록 건의하였다. 대사성 판전교사(大司成判典校事)로 승진한 뒤 1367년에는 신돈(辛旽)에게 발탁되어 차자방지인(箚子房知印)이 되고, 신돈에게 전민쟁송(田民爭訟)을 처리할 기관을 세우도록 건의해서 추정도감(推整都監)을 설립하여 그 사(使)로 임명되어 많은 쟁송을 처단하였다.

1375년(우왕 1) 이인임(李仁任)북원(北元)과 국교를 맺으려고 꾀하였는데, 이 당시 좌대언으로 있으면서 박상충(朴尙衷) 등과 이에 반대하였다. 그로 인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길안에 유배되고, 그뒤 무안으로 이배되는 도중에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