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安戩)
[상세내용]
안전(安戩)
미상∼1298년(충렬왕 24).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舊]).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를 역임하였고 1249년(고종 36) 낭장으로 몽고에 다녀왔다.
1275년(충렬왕 1) 전라도안찰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응방의 오숙부(吳淑富) 등이 세도를 믿고 패행을 하자 장흥부부사 신좌선(辛佐宣) 등과 함께 이를 미워하여 예대(禮待)하지 않았다. 이에 오숙부 등이 돌아가서 안전과 신좌선이 먹이를 주지 않아 가장 아름다운 매 두마리가 죽었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후에 내료(內僚) 이지저(李之氐)에게 부탁하여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대부소윤(大府少尹)으로서 필도지(必闍赤)가 되고, 1285년(충렬왕 11)에는 판비서사(判祕書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등을 급제시켰다.
이듬해에 좌승지가 되었는데 왕이 한 내환(內宦)에게 참관을 제수하고자 하므로 끝내 이를 만류하여 왕이 마음을 돌이켰다 한다.
이와같이 전주(銓注)를 맡아 굳게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쇠떡〔鐵餻〕이라 칭하였다.
1287년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이어 충청도안무사(忠淸道安撫使), 이듬해에 지밀직사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290년 합단적(合丹賊)이 동쪽 변방을 내침해왔을 때 경상도도지휘사‧충청도도지휘사, 1292년 서북면도지휘사를 역임하였다.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를 역임하였고 1249년(고종 36) 낭장으로 몽고에 다녀왔다.
1275년(충렬왕 1) 전라도안찰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응방의 오숙부(吳淑富) 등이 세도를 믿고 패행을 하자 장흥부부사 신좌선(辛佐宣) 등과 함께 이를 미워하여 예대(禮待)하지 않았다. 이에 오숙부 등이 돌아가서 안전과 신좌선이 먹이를 주지 않아 가장 아름다운 매 두마리가 죽었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후에 내료(內僚) 이지저(李之氐)에게 부탁하여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대부소윤(大府少尹)으로서 필도지(必闍赤)가 되고, 1285년(충렬왕 11)에는 판비서사(判祕書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등을 급제시켰다.
이듬해에 좌승지가 되었는데 왕이 한 내환(內宦)에게 참관을 제수하고자 하므로 끝내 이를 만류하여 왕이 마음을 돌이켰다 한다.
이와같이 전주(銓注)를 맡아 굳게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쇠떡〔鐵餻〕이라 칭하였다.
1287년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이어 충청도안무사(忠淸道安撫使), 이듬해에 지밀직사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290년 합단적(合丹賊)이 동쪽 변방을 내침해왔을 때 경상도도지휘사‧충청도도지휘사, 1292년 서북면도지휘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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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