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鄭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9C0FFFFB1347X0 |
이명(異名) | 정준제(鄭准提) |
시호(諡號) | 경렬(景烈) |
생년 | 1347(충목왕 3) |
졸년 | 1391(공양왕 3)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금성(錦城)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지(鄭地)
1347년(충목왕 3)∼1391년(공양왕 3). 고려의 무신. 초명은 정준제(鄭准提). 본관은 금성(錦城)(주1)
.
부친은 정리(鄭履)이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으로 해도원수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가 되고,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와 이키도(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시 함께 회군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죽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본관 |
본관을 하동(河東)에서 금성(錦城)으로 수정함. 금성정씨 정성(鄭盛)의 손자임. |
부친은 정리(鄭履)이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으로 해도원수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가 되고,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와 이키도(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시 함께 회군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죽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윤용혁(尹龍爀)
성명 : "정지(鄭地)"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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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