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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다구(洪茶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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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준기(俊奇)
생년1244(고종 31)
졸년1291(충렬왕 17)
시대고려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변란 > 반역자
홍복원(洪福源)
조부홍대선(洪大宣)

[상세내용]

홍다구(洪茶丘)
1244년(고종 31)∼1291년(충렬왕 17). 고려 원종충렬왕 때의 부원(附元)분자. 본관은 남양(南陽[唐]). 본명은 준기(俊奇), 다구는 소자(少字)이다.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한 대선(大宣)의 손자이며, 역시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고려 침략을 향도하였던 홍복원(洪福源)의 아들이다.

몽고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종군하면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조가 소자(少字)로써 그를 불렀다고 한다.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總管)에 임명되었으며, 1263년에는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참소하여 당시 그가 에서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을 탈취하였다.

그뒤 1269년 원종임연(林衍)을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군사를 요청함에 따라 다음해에 국왕 두연가(頭輦哥)를 좇아 3,000의 귀부군(歸附軍)을 이끌고 처음 고려에 왔으며, 이로부터 봉주(鳳州)둔전총관부(屯田總管府)에 주둔하면서 당시 고려에 있던 부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진도제주도의 삼별초 진압을 지휘하였으며, 계속해서 1274년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과 조선의 조달을 감독하고 곧이어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로서 일본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1277년 진국상장군 정동도원수(鎭國上將軍征東都元帥)에 임명되어 일본정벌에 대비하였으나, 때마침 원나라의 상도(上都)에서 지로와대(只魯瓦歹)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본정벌이 연기되자 승상(丞相) 백안(伯顔)을 쫓아 상도를 공략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해에 고려에서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해서 김방경(金方慶) 무고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에 들어와 김방경을 고문하고 고의로 사건을 확대시켜 고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려다 충렬왕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의하여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그 뒤 1279년 원나라에서 다시 일본정벌을 추진하자 동정군(東征軍)의 지휘를 자청하였고, 고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해에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일본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일본정벌 역시 실패로 끝나고 곧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로는 다시 고려에 오지 못하였다.

1284년에도 다시 정동행성우승에 임명되었으나 곧 일본정벌 계획이 무산되었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이 되었다. 이후 1290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이해에 내안의 여당인 합단(哈丹)고려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양행성의 관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新元史

[집필자]

이익주(李益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