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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崔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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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최종유(崔宗裕)
이명(異名)최안(崔安)
자(字)수덕(樹德)
호(號)동산수(東山叟)
시호(諡號)문청(文淸)
생년1188(명종 18)
졸년1260(원종 1)
시대고려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민(崔敏)
저서『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저서『속파한집(續破閑集)』
저서『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저서『동문선(東文選)』

[상세내용]

최자(崔滋)
1188년(명종 18)∼1260년(원종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 명유(名儒)인 문헌공 최충(崔冲)의 6대손이며, 우복야 최민(崔敏)의 아들이다.

1212년(강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국자감 학유(國子監學諭)에 이르렀다.

그뒤 10년간은 관운이 트이지 않다가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수정배시(水精盃詩)」로써 이규보(李奎報)에게 알려져 이것이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최이(崔怡)가 문병(文柄)을 잡을만한 후계자를 묻자, 이규보최자를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래서 문재(文才)를 열번 시험하였는데, 다섯번 1등을 하고 다섯번은 2등을 하였다. 다시 이재(吏才)를 시험하려고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를 시키자 민첩하고 근면하여 인정을 받았다.

한때 제주태수로 있었고, 고종정언을 거쳐서 상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내직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다.

1233년(고종 20)에 최린(崔璘)권술(權述)과 함께 금나라로 문안사행을 갔다. 한때 충청‧전라 안찰사가 되었고, 그뒤 국자감대사성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상서우복야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추밀부사가 되어 1250년 2월 중서사인(中書舍人) 홍진(洪縉)과 함께 몽고에 들어갔다.

1256년 11월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가 되었고, 다시 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

1258년 유경(柳璥)김준(金俊, 金仁俊) 등이 최의(崔竩)를 죽여서 4대째 내려오던 최씨정권이 무너졌으나, 수상으로서 난국을 잘 타개하였다.

1259년 1월 몽고의 침입이 있자 고관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항전을 두고 중론이 분분하였는데, 추밀원사 김보정(金寶鼎)과 함께, 강도(江都)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나아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서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다. 문학평론사상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체로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일찍이 최충헌의 노속(奴屬)으로 있는 김준최이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김준의 아들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

저서로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1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속파한집(續破閑集)』(補閑集으로 고쳐부름) 3권이 현전한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 1편이, 『동문선(東文選)』에 부(賦)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大東韻府群玉
崔滋의 批評(車柱環, 東亞文化 9, 서울大學校東亞文化硏究所, 1970)
崔滋批評硏究(金周漢, 高麗時代의 言語와 文學, 형설출판사, 1975)
崔滋의 文學理論(李相翊, 우봉 한상갑선생환력기념논문집, 1975)

[집필자]

박노춘(朴魯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