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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鄭知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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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정지원(鄭之元)
호(號)남호(南湖)
생년?(미상)
졸년1135(인종 13)
시대고려중기
본관서경(西京)
활동분야문신 > 문신
출신지서경
출신지서경

[상세내용]

정지상(鄭知常)
미상∼1135년(인종 13). 고려의 문신. 서경 출신. 초명은 정지원(鄭之元).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서경(西京)(주1)
본관
서경정씨족보를 참고하여 본관을 서경(西京)으로 수정함. 서경정씨 시조임.
.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하였다.

1127년(인종 5) 좌정언으로 척준경(拓俊京)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므로 이를 탄핵하여 유배하도록 하였으며, 1129년 좌사간으로 기거랑(起居郞) 윤언이(尹彦頤) 등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올리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정치에 깊이 간여하면서 음양비술(陰陽祕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서경 출신으로 서울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며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성향이 강하던 개경세력과 대립하였다. 그 결과 서경을 거점으로 하여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여기에 적극 가담하여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선 개경세력의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하여 개경에서 참살되었다. 정지상은 정치적 인물로서만이 아니라, 문인으로서 특히 뛰어난 시인으로서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그의 시재에 관해서는 이미 5세 때에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가 야사로 전해올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 왕명에 따라 곽여(郭輿)를 위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시재로 인하여 고려 12시인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역학(易學)‧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글씨에도 능통하였는데, 특히 사륙변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신설(新雪)」‧「향연치어(鄕宴致語)」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백률사(栢律寺)」‧「서루(西樓)」 등이 전하며, 『정사간집(鄭司諫集)』『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시 몇 수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補閑集
破閑集
鄭知常(梁柱東,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80)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