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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朴仁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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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산(壽山)
생년1144(인종 22)
졸년1212(강종 1)
시대고려중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문학 > 문인

[상세내용]

박인석(朴仁碩)
1144년(인종 22)(주1)
생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朴仁碩墓誌銘]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함. 졸년(1212)에서 "68"을 역산하여 생년(1144)을 계산함.
~1212년(강종 1)(주2)
졸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朴仁碩墓誌銘]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함. "壽至六十有九以今上卽位二載 大金崇慶元年四月壬午以病卒私第"를 참조.
. 고려 무인집권기의 문인. 자는 수산(壽山)(주3)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朴仁碩墓誌銘]을 참고하여 자를 추가함. "諱仁碩字壽山" 참조.
. 본관은 광주(廣州)(주4)
본관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朴仁碩墓誌銘]을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함. "廣州延昌郡人" 참조.
.

당시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던 유승단(兪升旦)이 극찬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신종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일대에서 민란이 계속되자 1202년(신종 5) 최충헌(崔忠獻)이 문무관 3품 이상을 사제(私第)에 모아 대책을 의논할 때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반란민들을 선유하였다.

그러나 반란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병마사로 삼아 토벌하니 그들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1204년 3월 초토사(招討使) 정언진(丁彦眞) 등이 돌아오자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남은 무리들을 진압하였다. 그해 5월 김순(金順) 등 20여명을 사로잡아 민란진압에 큰 공헌을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정신(李貞信)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