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琴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E08C758FFFFB1153X0 |
이명(異名) | 금극의(琴克儀) |
자(字) | 절지(節之) |
시호(諡號) | 영렬(英烈) |
생년 | 1153(의종 7) |
졸년 | 1230(고종 17)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봉화(奉化)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공신호 | 삼한공신(三韓功臣) |
공신호 | 벽상공신(壁上功臣) |
[상세내용]
금의(琴儀)
1153년(의종 7)∼1230년(고종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초명은 금극의(琴克儀), 자는 절지(節之).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의 후예이다. 어려서 학문에 힘써 글짓기를 잘 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 청도의 감무로 나갔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하였다.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보직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를 구할 때 이종규(李宗揆)의 추천으로 발탁되자 신임을 얻어 화요(華要)의 직을 거치고, 신종 때에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尙書右丞右諫議大夫太子贊善大夫)가 되었으며, 한때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희종 때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 등을 지냈다.
1212년(강종 즉위) 왕의 즉위에 대한 책명사의 접대에 공을 세우고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院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1215년(고종 2)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修國史),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고, 1220년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는 금학사(琴學士)로 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보직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를 구할 때 이종규(李宗揆)의 추천으로 발탁되자 신임을 얻어 화요(華要)의 직을 거치고, 신종 때에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尙書右丞右諫議大夫太子贊善大夫)가 되었으며, 한때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희종 때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 등을 지냈다.
1212년(강종 즉위) 왕의 즉위에 대한 책명사의 접대에 공을 세우고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院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1215년(고종 2)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修國史),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고, 1220년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는 금학사(琴學士)로 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집필자]
하현강(河炫綱)
대표명 | 금의(琴儀) |
명 | 의(儀) |
명 : "의(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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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