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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孝恭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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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요(金嶢)
생년?(미상)
졸년912(신덕왕 1)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조모영화부인(寧花夫人)
외조부예겸(乂謙)
묘소사자사(師子寺)
묘소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상세내용]

효공왕(孝恭王)
미상∼912년(신덕왕 1). 신라 제52대왕. 재위 897∼912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김요(金嶢).

헌강왕의 서자이며, 모친은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寧花夫人)이며,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진성여왕 9)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弓裔)견훤(甄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효공왕 5)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百官)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

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王建)은 903년 병선(兵船)을 이끌고 금성(錦城)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09년에 왕건진도군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중국 오월(吳越)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失政)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殷影)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