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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율희(蘇律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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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율희(金律熙)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활동분야기타 > 지방세력가

[상세내용]

소율희(蘇律熙)
생졸년 미상. 신라 효공왕김해 지방의 세력가.

원래 김해 지방의 가장 유력한 호족세력은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이라는 관직을 가졌던 김인광(金仁匡)이었는데, 906년(효공왕 10)을 전후하여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소율희 형제가 새로 등장하여 김인광을 몰아내고 소충자가 대신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었다.

이때 소율희는 형 밑에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충자의 대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가 되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907년부터 911년 사이로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뒤 소율희김율희(金律熙)로 이름을 고쳤는데, 김율희는 ‘쇠유리’의 한자표기로서, 신라 말기에 와서 전래성(傳來姓)을 가지지 못하였던 지방의 피지배층 안에서 대두하던 호족세력들이 새로운 성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런데 소율희는 이름을 고치면서 김씨(金氏)를 칭성하게 된 단계에 와서는 그 관직명도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로 개칭하고 김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고려가 새로 건국되어 태조 왕건(王建)후백제 견훤(甄萱)의 양대세력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지역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할 시기에 와서는 그는 점차 무력화하여 경애왕대에 이르면 완전히 몰락하였던 것 같다.

이렇게 된 까닭은 당시 이 지역의 호족세력들이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과 견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을 때에 소율희가 이미 잔존세력으로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신라와의 연결을 계속 유지하였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그의 친신라적인 정책의 고수는 결과적으로 신라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고 짐작된다.

한편, 그는 선종(禪宗)의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효공왕 때에는 김해 지방이 선종의 요람지로서 전국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많은 선승(禪僧)들이 모여 들어와 이곳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러한 선승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사람만도 심희(審希)행적(行寂)이엄(利嚴)진공대사(眞空大師)충담(忠湛) 등 5인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심희소율희의 후원으로 김해지방에서 봉림산파(鳳林山派)를 개창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그밖에 다른 선승들은 후원자인 그의 몰락과 함께 모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행적은 사굴산파(闍堀山派)의 개조 범일(梵日)의 제자로서 907년 김해 지방에 와서 소율희의 후원을 받으면서 8년간 머물다가 915년(신덕왕 4)에 신덕왕의 초청을 받아 경주로 갔다.

그 다음 이엄은 뒤에 고려 태조의 후원으로 해주 지방의 광조사(廣照寺)에서 수미산파(須彌山派)를 개창했던 사람으로 김해 지방에 911년부터 915년까지 4년간 머물다가 이곳을 떠나 영동지방의 영각산사(靈覺山寺)로 옮겨갔다. 그밖에 진공대사는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였던 선승으로서 김해 지방에 머물다가 그뒤 풍기지방의 소백산사(小伯山寺)로 옮겨갔다.

그밖에 충담은 그의 비문의 결락으로 어느 선파에 속한 선승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도 중국유학에서 돌아온 뒤 한때는 김해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뒤 그 후원자인 소율희 세력의 몰락을 예견하고 이곳을 떠나 개경고려 태조를 찾아갔다. 이처럼 김해 지방에서의 선종은 결국 쇠퇴하여버리고 말았으나, 이들 소율희의 후원을 받았던 선승들이 김해 지방을 떠난 뒤에도 각처에서 계속 활약함으로써 신라말과 고려초의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金石總覽 上
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崔柄憲, 韓國史論 4,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78)

[집필자]

최병헌(崔柄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