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神德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0B355C655D0917X0 |
이명(異名) | 박경휘(朴景暉 또는 朴景徽) |
이명(異名) | 박수종(朴秀宗) |
시호(諡號) | 신덕(神德) |
생년 | ?(미상) |
졸년 | 917(신덕왕 6) |
시대 | 신라 |
활동분야 | 왕실 > 왕 |

부 | 박예겸(朴乂兼) |
모 | 정화부인(貞花夫人) |
처 | 의성왕후(義成王后) |
외조부 | 순홍(順弘) |
묘소 | 잠현(箴峴) |

[상세내용]
신덕왕(神德王)
미상∼917년(신덕왕 6). 신라 제53대왕. 재위 912∼917년.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 본명은 수종(秀宗). 아달라왕의 원손으로 부친은 정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고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박예겸(朴乂兼,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부친은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모친은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懿成王后)이다.
슬하에 승영(昇英)‧위응(魏膺)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916년(신덕왕 5)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泰封)의 공격을 막아낼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竹城: 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부친은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모친은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懿成王后)이다.
슬하에 승영(昇英)‧위응(魏膺)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916년(신덕왕 5)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泰封)의 공격을 막아낼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竹城: 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三國遺事
高麗史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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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