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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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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발휘이사금(發暉尼師今)
생년?(미상)
졸년196(벌휴이사금 13)
시대신라
활동분야왕실 > 왕
김씨(金氏)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

[상세내용]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미상∼196년(벌휴이사금 13). 신라 제9대왕. 재위 184∼196년. 발휘이사금(發暉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씨. 부계(父系)는 탈해왕의 아들인 구추각간(仇鄒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伐休系)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스스로 부회(附會)하였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邪正)을 알아맞혀 성인(聖人)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즉위조 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모친은 김씨(金氏)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벌휴가 즉위한 것은 아달라이사금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문화수준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새로운 세력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석씨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

185년(벌휴이사금 2)에 구도(仇道)구수혜(仇須兮)를 처음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치고, 이어 188년 모산성(母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혹은 경상북도 의성 부근), 189년 구양성(狗壤城: 지금의 괴산 또는 옥천), 190년 원산향(圓山鄕: 지금의 예천군 용궁)부곡성(缶谷城: 지금의 군위군 부계) 등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치렀다고 전한다.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와의 제휴시대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집필자]

신종원(辛鍾遠)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