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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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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석토해(昔吐解)
생년?(미상)
졸년80(파사이사금 1)
시대신라
활동분야왕실 > 왕
함달파왕(含達婆王)
아효(阿孝‧阿尼)
외조부여국왕(女國王)
묘소양정(壤井)

[상세내용]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미상∼서기 80년(파사이사금 1). 신라 제4대왕. 재위 57∼80년.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부친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모친은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년(남해차차웅 5)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서기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서기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서기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

[이미지]

[집필자]

신종원(辛鍾遠)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