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6C544B2ECB77CD0184X0 |
이명(異名) | 아달라왕(阿達羅王) |
생년 | ?(미상) |
졸년 | 184(아달라이사금 31) |
시대 | 신라 |
활동분야 | 왕실 > 왕 |

모 | 박씨(朴氏) |
처 | 내례부인(內禮夫人) |
외조부 | 지소례왕(支所禮王) |

[상세내용]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미상∼184년(아달라이사금 31). 신라 제8대왕. 재위 154∼184년. 성은 박씨(朴氏).
부친은 일성이사금이고, 모친은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로 박씨(朴氏)이다. 왕비는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다.
이와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6년(아달라이사금 3)과 158년에는 계립령(鷄立嶺: 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과 죽령(竹嶺: 풍기 북쪽고개)을 각각 개통하여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뻗쳤다.
167년에는 군사 2만명과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었다. 이러한 서북지역에 대한 영토개척을 석씨(昔氏)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九道)가 파진찬(波珍飡)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親昔氏系)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부친은 일성이사금이고, 모친은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로 박씨(朴氏)이다. 왕비는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다.
이와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6년(아달라이사금 3)과 158년에는 계립령(鷄立嶺: 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과 죽령(竹嶺: 풍기 북쪽고개)을 각각 개통하여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뻗쳤다.
167년에는 군사 2만명과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었다. 이러한 서북지역에 대한 영토개척을 석씨(昔氏)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九道)가 파진찬(波珍飡)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親昔氏系)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3, 1976)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3, 1976)
[집필자]
신종원(辛鍾遠)
대표명 |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
왕명 | 아달라(阿達羅), 아달라왕(阿達羅王)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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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