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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東城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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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모대(牟大)
이명(異名)마제(麻帝)
이명(異名)여대(餘大)
생년?(미상)
졸년501(무녕왕 1)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곤지(昆支)
처부비지(比智)

[상세내용]

동성왕(東城王)
미상∼501년(무령왕 1). 백제 제24대왕. 재위 479∼501년. 이름은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여대(餘大)라고도 한다.

21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삼근왕 때에 일어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장악한 진씨(眞氏)세력에 의하여 옹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성왕웅진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첫째로, 금강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하여 온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세력균형을 꾀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신진세력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하여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解氏)‧진씨 등 남래귀족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지배세력의 구성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둘째로, 동성왕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동성왕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하였고, 또 고구려백제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였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셋째로 동성왕웅진천도 이후 고구려 수군에 의하여 서해의 해상교통로가 차단당하여 국제적 고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넷째로,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또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하여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沙井城)가림성(加林城) 등을 축조하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밖에 동성왕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진주(武珍州)까지 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것에 대한 신하의 간언을 물리쳐버리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지역에 파견하여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또 여기에 보이는 왕‧후‧태수‧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이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신구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또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여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힘이 점차 증대하여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가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하여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泗沘西原)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동성왕의 피살에 대하여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이 무도포학하므로 국인(國人)이 제거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의 국인은 백가를 비롯한 반왕파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가세력에 의한 동성왕의 암살은 전제적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한성함락 이후 축소된 백제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주었고 나아가 무녕왕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의 토대를 놓아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南齊書
韓國古代史硏究(李丙燾, 1976)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牟都에 대하여(李基東, 歷史學報 62, 1974)
百濟의 佐平(李鍾旭, 震檀學報 45, 1978)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㳓劤博土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漢城末熊津時代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李道學, 韓國史硏究 50‧51합집, 1985)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坂元義種, 1978)
百濟史の硏究(坂元義種, 1978)

[집필자]

노중국(盧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