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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文周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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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문주왕(文洲王)
이명(異名)문주왕(文州王)
생년?(미상)
졸년477(고구려: 장수왕 65/백제: 문주왕 3, 삼근왕 1/신라: 자비마립간 20)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문주왕(文周王)
미상∼477년. 백제 제22대왕. 재위 475∼477(三國史記 年表에는 3년간, 本紀에는 4년간으로 되어 있다.). 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로도 쓴다.

제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한강유역일대를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왕이다. 왕자로 있을 때는 부왕(父王)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漢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아,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 뒤의 수습에 임하였다.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 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扶餘氏)나 해씨(解氏)‧진씨(眞氏) 등 부여족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있었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집필자]

노명호(盧明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