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상(徐文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BB38C0C1B1630X0 |
자(字) | 국익(國益) |
호(號) | 송파(松坡) |
호(號) | 나산(羅山) |
생년 | 1630(인조 8) |
졸년 | 1677(숙종 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정리(徐貞履)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문상(徐文尙)
1630년(인조 8)∼1677년(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국익(國益), 호는 송파(松坡)‧나산(羅山).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의 아들이다.
1655년(효종 6) 진사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정언‧문학을 지냈다.
이듬해 사서(司書)‧부수찬, 1674년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1677년(숙종 3) 병조참의에 올랐다.
한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풍문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아들 서종태(徐宗泰)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의 아들이다.
1655년(효종 6) 진사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정언‧문학을 지냈다.
이듬해 사서(司書)‧부수찬, 1674년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1677년(숙종 3) 병조참의에 올랐다.
한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풍문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아들 서종태(徐宗泰)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晩靜堂集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晩靜堂集
[집필자]
이수건(李樹健)
명 : "문상(文尙)"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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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3 | 문과방목과 사마방목,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