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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서(趙之瑞)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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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부(伯符)
호(號)지족당(知足堂)
호(號)충헌(忠軒)
생년1454(단종 2)
졸년1504(연산군 10)
시대조선전기
본관임천(林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찬(趙瓚)
외조부정삼(鄭參)

[상세내용]

조지서(趙之瑞)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 또는 충헌(忠軒).

부친은 사헌부감찰 조찬(趙瓚)이며, 모친은 생원 정삼(鄭參)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78∼1479년에는 통신사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다.

1479년 승문원저작으로 다시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형조좌랑에 발탁되었으며, 이해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魚有沼)종사관이 되어 서정에 참가하였으나, 어유소의 파병(罷兵)과 관련된 전명(傳命)을 잘못한 일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뒤 1481년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서반직에 복직된 뒤 성종대를 통하여 교리형조정랑지평응교, 세자시강원필선보덕을 역임하였으며, 이와 함께 경연(經筵)의 시독관(侍讀官) 과시강관(侍講官)을 항상 겸대하였다.

이어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시에 그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하였던 연산군의 기휘(忌諱)로 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충효와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동문선』에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1수가 전한다.

1506년(중종 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경상남도 진양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東文選
韓國人의 族譜(日新閣, 1985)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