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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흡(姜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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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정오(正吾)
호(號)잠은(潛隱)
시호(諡號)정민(貞敏)
생년1602(선조 35)
졸년1671(현종 12)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윤조(姜胤祖)
조부강덕서(姜德瑞)

[상세내용]

강흡(姜恰)
1602년(선조 35)∼1671년(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

조부는 응교 강덕서(姜德瑞), 부친은 도사 강윤조(姜胤祖)이다.

신흠(申欽)의 문인으로 29세 때인 1630년(인조 8)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1635년에 율곡(栗谷) 이이(李珥)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종향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처음에는 허락받지 못하다가 뒤에 허락을 받았다. 전란(戰亂)을 치른 후 남쪽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3년이 지나서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에 세마(洗馬)에 배수되었는데 열심히 직분에 임해서 시직(侍直)부수(副率)의 반열에 올랐다. 계모 윤씨가 죽자 효행이 지극함을 인정받아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로 성현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곳에 가축의 병이 크게 유행하여 소가 많이 죽었는데 영동에서 소를 사서 역호(驛戶)의 대소를 헤아려 나누어 기르게 하여 폐농을 면하게 하였으며, 소도 많이 번식시켰다. 그리하여 역졸들은 이 소를 ‘강후우(姜侯牛)’라 하였다. 이 공으로 산음현감(山陰縣監)으로 승진하여 선정을 베풀고 임기가 끝나 떠날 때는 이민(吏民) 수천명이 울었다고 한다.

1858년 철종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정민(貞敏)으로 증시(贈諡)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후에 심장세(沈長世)홍우정(洪宇定)정양(鄭瀁)홍석(洪錫) 등과 같이 태백산 춘양동(春陽洞)에 은거하였는데, 이들을 태백 5현(太白五賢)이라 하였다.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는 강흡이 병자호란 후 관직을 사퇴하고 태백산 아래 양촌(楊村)에 홍송(紅松)으로 집을 짓고 당호를 도은구거(陶隱舊居)라 하였는데, 현재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전유경(全有慶)『각암집(覺菴集)』에는 「잠은강흡서(潛隱姜恰書)」가 10통이 있는데, 강흡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자 동학(同學)이었던 전유경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宣祖實錄
陶菴集
覺菴集
承政院日記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3-03[철종실록 10권] 1858년 1월 20일조를 참고하여 이름 강영(姜怜)을 강흡(姜恰)으로 고침. 그리고 같은 태백오현의 한 사람인 민양(閔瀁)을 정양(鄭瀁)으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