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춘보(徐春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D98BCF4B1776X0 |
자(字) | 화세(和世) |
시호(諡號) | 숙렬(肅烈) |
생년 | 1776(영조 52) |
졸년 | 1825(순조 25)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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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 서지수(徐志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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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서춘보(徐春輔)
1776년(영조 52)∼1825년(순조 25).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화세(和世).
좌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손자이다.
1798년(정조 22) 별군직(別軍職)으로 조정에 들어가 2년 뒤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으며, 이어 정주목사(定州牧使)‧황해병사(黃海兵使)‧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총융사(總戎使)‧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목사로서 출정하였으며, 영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위유사(慰諭使)가 되었는데 일찍이 무신으로 위유사가 된 적이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승지의 직함을 받아 임명될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 좌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포교(捕校)와 원례(院隷)간의 싸움을 두고 원례만 다스렸다는 편파성으로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서북지방의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대의로써 민을 독려하는 것을 보고는 거병(擧兵)들조차도 일찍이 그가 가산(嘉山)‧정주의 수령으로 애민한 이력을 알고서 “어찌 그와 서로 포시(砲矢)를 향하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민심을 얻기도 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좌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손자이다.
1798년(정조 22) 별군직(別軍職)으로 조정에 들어가 2년 뒤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으며, 이어 정주목사(定州牧使)‧황해병사(黃海兵使)‧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총융사(總戎使)‧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목사로서 출정하였으며, 영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위유사(慰諭使)가 되었는데 일찍이 무신으로 위유사가 된 적이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승지의 직함을 받아 임명될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 좌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포교(捕校)와 원례(院隷)간의 싸움을 두고 원례만 다스렸다는 편파성으로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서북지방의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대의로써 민을 독려하는 것을 보고는 거병(擧兵)들조차도 일찍이 그가 가산(嘉山)‧정주의 수령으로 애민한 이력을 알고서 “어찌 그와 서로 포시(砲矢)를 향하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민심을 얻기도 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哲宗實錄
純祖實錄
哲宗實錄
[집필자]
장필기(張弼基)
대표명 | 서춘보(徐春輔) |
성명 | 서춘보(徐春輔) |
성명 : "서춘보(徐春輔)"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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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3 | 무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