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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흠(宋文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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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행(士行)
호(號)한정당(閒靜堂)
생년1710(숙종 36)
졸년1752(영조 28)
시대조선후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요좌(宋堯佐)
파평윤씨(坡平尹氏)
조부송병원(宋炳遠)
조부송병원(宋炳遠)
고조부송준길(宋浚吉)
외조부윤부(尹扶)

[상세내용]

송문흠(宋文欽)
1710년(숙종 36)∼1752년(영조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행(士行), 호는 한정당(閒靜堂).

문정공(文貞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4세손으로,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 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인데,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黙翁)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형이 바로 당대의 선비로 손꼽히던 늑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형 송명흠과 더불어 송씨의 쌍벽(雙璧)이라 불리었다. 1733년(영조 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 『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1739년(영조 15)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 뒤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에 임명되었는데, 조태구(趙泰耉)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 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다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 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 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 28) 12월 15일, 향년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한밭人物誌
大田市史
大德郡誌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