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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호(張自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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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겸(守謙)
호(號)아류(丫流)
생년1583(선조 16)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인동(仁同[3])
활동분야문신 > 문신
장세철(張世哲)
조부장경안(張景安)
증조부장명원(張明遠)
외조부이정호(李廷虎)

[상세내용]

장자호(張自好)
1583년(선조 16)∼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3]). 자는 수겸(守謙), 호는 아류(丫流).

장명원(張明遠)의 증손으로, 조부는 장경안(張景安)이고, 부친은 한성부좌윤 장세철(張世哲)이며, 모친은 이정호(李廷虎)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처음 관직에 올라 홍문관저작, 겸설서, 홍문관박사를 거쳐 1615년(광해군 7) 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 이정귀(李廷龜)와 함께 서장관으로 6개월 동안 중국을 다녀온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예조참의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4개월만에 사직소를 올려 휴가를 허락받았으며, 이어 진위사(陳慰使)에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나이가 70된 수령은 300리 밖의 지역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규례에 따라 관직을 교체해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이첨(李爾瞻)의 도움으로 청화직을 두루 역임했던 그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배되었으나 곧 사유(赦宥: 죄를 용서하여 줌)를 받았다. 이어 큰 고을을 두루 맡았으며, 1625년(인조 3)에는 성절사 겸 동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중국에 보낼 사신의 선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자 관직이 교체되었다. 1648년(인조 26) 삼척부사로 재직중 암행어사 이정영(李正英)의 탄핵을 받아 흥해(興海)로 장배(杖配)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