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원(韓以原)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C774C6D0B1651X0 |
자(字) | 숙기(叔起) |
생년 | 1651(효종 2) |
졸년 | 1720(숙종 4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곡산(谷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한치상(韓致相)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이원(韓以原)
1651년(효종 2)∼1720년(숙종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숙기(叔起). 한치상(韓致相)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를 거쳐, 168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이 되었다가 1692년 결성현감을 거쳐, 1694년 전적을 역임하고 이어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1698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1701년 충청도도사가 되었다가 병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문안들을 한번 보고 바로 거짓임을 적발하여냄으로써 하리(下吏)들이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그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향리에 있다가 상기를 마치고 고산찰방‧장령을 거쳐 해미현감이 되었다. 그때 해적떼가 수백척의 배를 몰고 온다는 헛소문으로 주민들이 동요하였는데, 그는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현민들을 안정시켰다.
1715년 가례원류사건(家禮源流事件)으로 소론인 교리 송성명(宋成明)을 논척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16년 장악원정이 되었고, 다음해 필선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18년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효종묘정 배향을 청하였으며, 사복시정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를 거쳐, 168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이 되었다가 1692년 결성현감을 거쳐, 1694년 전적을 역임하고 이어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1698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1701년 충청도도사가 되었다가 병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문안들을 한번 보고 바로 거짓임을 적발하여냄으로써 하리(下吏)들이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그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향리에 있다가 상기를 마치고 고산찰방‧장령을 거쳐 해미현감이 되었다. 그때 해적떼가 수백척의 배를 몰고 온다는 헛소문으로 주민들이 동요하였는데, 그는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현민들을 안정시켰다.
1715년 가례원류사건(家禮源流事件)으로 소론인 교리 송성명(宋成明)을 논척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16년 장악원정이 되었고, 다음해 필선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18년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효종묘정 배향을 청하였으며, 사복시정이 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송준호(宋寯鎬)
대표명 | 한이원(韓以原) |
성명 | 한이원(韓以原) |
성명 : "한이원(韓以原)"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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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