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신유(申鍒)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C2E0C720FFFFB1642X0
자(字)유중(柔中)
생년1642(인조 20)
졸년1702(숙종 28)
시대조선중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명규(申命圭)
의령남씨(宜寧南氏)
조부신상(申恦)
처부이문진(李文袗)

[상세내용]

신유(申鍒)
1642년(인조 20)∼1702년(숙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중(柔中).

고려시대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조부(祖父) 신상(申恦)종성부사(鍾城府使)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아버지 신명규(申命圭)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1673년(현종 14) 회시(會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74년(숙종 1) 비변사낭관(備邊司郞官)이 되었다. 1676년(숙종 2)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승진하고, 가을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승진하였다가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나갔다. 1679년(숙종 5)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에 임명되었다. 1680년(숙종 6) 여름 이천현감(伊川縣監)에 임명되고, 겨울 영암군수(靈巖郡守)로 전직되었다.

1683년(숙종 9) 백성을 잘 구휼(救恤)하였다 하여 옷감 한 벌을 포상받고, 그해 여름 훈련원정(訓練院正)으로 승진하였다. 1685년(숙종 11) 우림장(羽林將)에 임명되었다가 1686년(숙종 12)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나갔다. 1687년(숙종 13) 금위천총(禁衛千摠)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그 뒤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전직되었다.

1688년(숙종 14) 여름 금위별장(禁衛別將)에서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부임하지 않다가 상(喪)을 당했다. 1691년(숙종 17) 임천(熙川)으로 귀양 갔다가 1694년(숙종 20) 특별히 사면을 받았다. 1696년(숙종 22) 가을 또 다시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임명되었다가 금위별장(禁衛別將)에 임명되었다. 1697년(숙종 23)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入侍)하여 무신 중에 인재가 없는 상황에 대해 극구 개진하고 사대부 자제들에게 무예를 권장하여 양성해 놓았다가 다급할 때 쓸 것을 요청하자 조정에서 그 의논을 채택하였다.

1702년(숙종 28) 병환으로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문진(李文袗)의 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신사열(申思說)이고, 딸은 진사(進士) 김상악(金相岳)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