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휴(朴承休)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2B9D734B1606X0 |
자(字) | 자미(子美) |
생년 | 1606(선조 39) |
졸년 | 1659(효종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안후(朴安厚) |
외조부 | 조흥무(趙興武)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승휴(朴承休)
1606년(선조 39)∼1659년(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미(子美).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지낸 박안후(朴安厚)의 아들이며, 모친은 교위(校尉) 조흥무(趙興武)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주장하였다.
그뒤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거쳐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전적‧호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을 때 장관(長官)이 하리(下吏)의 말에 따라 특정인사를 임용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그뒤 황해도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돌아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있으면서 동궁(東宮)을 보익(輔翼)할 방도를 소론(疏論)하여 채택하게 하였고, 헌납‧장령을 거쳐, 1655년 이후 경상좌우도추쇄어사(慶尙左右道推刷御史)‧사간‧제용감정(濟用監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659년 집의를 제수받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거처하는 방을 한번도 등져 앉거나 누워본 일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35년(인조 13)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주장하였다.
그뒤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거쳐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전적‧호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을 때 장관(長官)이 하리(下吏)의 말에 따라 특정인사를 임용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그뒤 황해도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돌아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있으면서 동궁(東宮)을 보익(輔翼)할 방도를 소론(疏論)하여 채택하게 하였고, 헌납‧장령을 거쳐, 1655년 이후 경상좌우도추쇄어사(慶尙左右道推刷御史)‧사간‧제용감정(濟用監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659년 집의를 제수받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거처하는 방을 한번도 등져 앉거나 누워본 일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대표명 | 박승휴(朴承休) |
성명 | 박승휴(朴承休) |
성명 : "박승휴(朴承休)"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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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