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세(沈光世)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CAD11C138B1577X0 |
자(字) | 덕현(德顯) |
호(號) | 휴옹(休翁) |
생년 | 1577(선조 10) |
졸년 | 1624(인조 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심엄(沈㤿) |
외조부 | 구사맹(具思孟) |
저서 | 『휴옹집』 |
저서 | 『해동악부(海東樂府)』 |

[상세내용]
심광세(沈光世)
1577년(선조 10)∼1624년(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현(德顯), 호는 휴옹(休翁).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현손이며 부친은 현감 심엄(沈㤿)이고, 모친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어 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에 승진하였고, 설서로 옮겨 무설(巫說)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로 물러났다.
1604년 전적‧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고, 해운판관(海運判官)‧부안현감 등을 지냈다.
1611년 정언에 이어 부수찬이 되었으나 파면되고, 이듬해 다시 정언을 거쳐 수찬‧지평‧교리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문학을 거쳐 교리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무고를 입고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다시 교리에 임명되고,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 및 안변십책(安邊十策) 등을 건의하였으며, 응교‧사인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성묘하러 고향에 갔다가 피난한 왕의 행재소로 가던 중 부여에서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휴옹집』‧『해동악부(海東樂府)』 등이 있다.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어 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에 승진하였고, 설서로 옮겨 무설(巫說)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로 물러났다.
1604년 전적‧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고, 해운판관(海運判官)‧부안현감 등을 지냈다.
1611년 정언에 이어 부수찬이 되었으나 파면되고, 이듬해 다시 정언을 거쳐 수찬‧지평‧교리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문학을 거쳐 교리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무고를 입고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다시 교리에 임명되고,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 및 안변십책(安邊十策) 등을 건의하였으며, 응교‧사인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성묘하러 고향에 갔다가 피난한 왕의 행재소로 가던 중 부여에서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휴옹집』‧『해동악부(海東樂府)』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명 : "광세(光世)"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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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