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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성(任尹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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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상경(商卿)
호(號)숙계(淑溪)
생년1547(명종 2)
졸년1608(선조 41)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임천수(任千壽)
출생지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고산면(高山面) 관동(寬洞: 옛날 고산현(高山縣))
저서『용학문답(庸學問答)』

[상세내용]

임윤성(任尹聖)
1547년(명종 2)∼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 문신. 자 상경(商卿)이고, 호는 숙계(淑溪)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고산면(高山面) 관동(寬洞: 옛날 고산현(高山縣))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참봉(參奉) 임천수(任千壽)이다.

어려서 이이(李珥)를 만나 공부하였는데, 『중용(中庸)』 책머리에는 율곡이 한 말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쓴 것을 보고 율곡이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하여 『용학문답(庸學問答)』을 펴내게 되었다.

1579년(선조 21)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시절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었는데 그의 박식함을 보고 율곡에게 빨리 등용하여 그의 재주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정(左議政)이었던 유성룡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이정귀(李廷龜)응교(應敎) 신흠(申欽) 등이 그를 천거하여 선무랑(宣務郞)에 제수(除授)되자 유생(儒生)들과 함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侍墓)를 하며 3년 상을 마쳤다. 그 후 1599년 전설사별좌(典設司別座)선교랑(宣敎郞)을 거쳐 봉훈랑(奉訓郞)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봉직랑(奉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08년(선조 41)에 경상도(慶尙道)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나가라는 부름이 있어 임지(任地)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668년(현종 9)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三奇里) 백현사(栢峴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고산지
완주군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천곡단지
호남절의록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