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효(金克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DF9D6A8B1542X0 |
자(字) | 희민(希閔) |
호(號) | 사미당(四味堂) |
생년 | 1542(중종 37) |
졸년 | 1618(광해군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안동(安東[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생해(金生海) |
조부 | 김번(金蕃) |
증조부 | 김영수(金永銖) |
외조부 | 이침(李忱) |
묘소 |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 |
공신호 | 원종공신(原從功臣) |

[상세내용]
김극효(金克孝)
1542년(중종 37)∼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 본관은 안동(安東[新]).
증조부는 상주판관(尙州判官)를 지낸 김영수(金永銖)이고, 조부는 평양서윤(平壤庶尹) 김번(金璠)이며, 부친은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지냈던 김생해(金生海)이다. 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부친은 성종(成宗)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사위였다.
또 김극효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정유길은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柳自新)을 사위로 두었다. 따라서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가 되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1562년(명종 17)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 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와 신도비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은 우의정(右議政), 4남인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左議政)에 오르는 등 그의 가문에서 고관대작이 조선말까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를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중시조로 삼는다.
증조부는 상주판관(尙州判官)를 지낸 김영수(金永銖)이고, 조부는 평양서윤(平壤庶尹) 김번(金璠)이며, 부친은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지냈던 김생해(金生海)이다. 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부친은 성종(成宗)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사위였다.
또 김극효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정유길은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柳自新)을 사위로 두었다. 따라서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가 되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1562년(명종 17)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 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와 신도비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김상용(金尙容)은 우의정(右議政), 4남인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左議政)에 오르는 등 그의 가문에서 고관대작이 조선말까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를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중시조로 삼는다.
[참고문헌]
韓國人名大辭典
南楊州市誌
南楊州市誌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