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鄭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6D0FFFFB1495X0 |
자(字) | 중원(仲遠) |
생년 | 1495(연산군 1) |
졸년 | 1546(명종 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유강(鄭有綱) |
공신호 | 보익공신(保翼功臣) |

[상세내용]
정원(鄭源)
1495년(연산군 1)∼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원(仲遠). 본관은 동래(東萊).
현감 정유강(鄭有綱)의 아들이며, 장령 정희등(鄭希登)의 당숙(堂叔)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이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임용되지 못하고, 이듬해 검열에 임용되어 시사(時事)를 직서(直書)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성균관전적을 거쳐 1524년 강릉훈도로 외임되었다.
이때 그 인물이 요사스럽고 간사하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경기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29년 형조좌랑에 임용되었다.
1532년 당시 권력자인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곤양군수로 외보(外補)되었으나, 곧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정랑‧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좌보덕을 역임하였다.
1544년 성절사(聖節使)사행의 불법물건소지의 조사를 위하여 수은어사(搜銀御史)로 의주에 파견되었으며, 그해 11월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용되었다.
1545년(인종 1)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한 뒤, 그해(명종 즉위) 명종을 왕위에 옹립한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뒤 좌부승지를 거쳤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대윤 일파로 몰려 공신호와 관직을 삭탈당한 뒤 창성에 유배되었다가, 이약빙(李若氷) 등과 유인숙(柳仁淑)일당으로 몰려 함께 사사(賜死)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신원되었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이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임용되지 못하고, 이듬해 검열에 임용되어 시사(時事)를 직서(直書)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성균관전적을 거쳐 1524년 강릉훈도로 외임되었다.
이때 그 인물이 요사스럽고 간사하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경기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29년 형조좌랑에 임용되었다.
1532년 당시 권력자인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곤양군수로 외보(外補)되었으나, 곧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정랑‧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좌보덕을 역임하였다.
1544년 성절사(聖節使)사행의 불법물건소지의 조사를 위하여 수은어사(搜銀御史)로 의주에 파견되었으며, 그해 11월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용되었다.
1545년(인종 1)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한 뒤, 그해(명종 즉위) 명종을 왕위에 옹립한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뒤 좌부승지를 거쳤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대윤 일파로 몰려 공신호와 관직을 삭탈당한 뒤 창성에 유배되었다가, 이약빙(李若氷) 등과 유인숙(柳仁淑)일당으로 몰려 함께 사사(賜死)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성명 : "정원(鄭原)"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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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