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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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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제이슨(Jason, p.)
자(字)윤경(允卿)
호(號)송재(松齋)
생년1864(고종 1)
졸년1951
시대항일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서광하(徐光夏)
생부서광효(徐光孝)
출신지전라남도 보성

[상세내용]

서재필(徐載弼)
1864년(고종 1)∼1951년. 개화기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윤경(允卿)(주1)
『國朝榜目』(국중도본[한古朝26-47])을 참고하여 자를 추가함.
,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전라남도 보성 출신.
1. 가계와 출사
서광효(徐光孝)의 둘째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칠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고종 19)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2. 일본유학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여 점점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군사훈련을 공부하고, 1884년 7월 귀국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 국왕의 승낙을 받고,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이 되었다.
3. 갑신정변 참가
1884년 12월에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진행중에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에 의한 새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4. 해외망명
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살 된 아들은 굶어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 1889년 6월 이 학교의 졸업생대표로 고별연설자가 될 정도로 특출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가졌는데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이 모두 희생되었으며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하였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에 2등으로 졸업한 뒤 이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에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행위를 하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5. 귀국과 개화운동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경장이 일어나 대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갑신정변 뒤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뒤이어 갑오경장 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다가 실각하여 미국에 들렀던 박영효가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6.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사상 고취
귀국 직후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고 신문의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의 재정자금 4,400원의 지원을 받고 국내의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마침내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신문으로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이어 국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큰 소임을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국민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1897년 11월에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는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는데,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가르쳤고,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민주주의사상을 가르쳤다.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의 발전에 그가 끼친 공헌은 매우 큰 것이었다.
7. 미국망명과 해외독립운동
그러나 수구파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꺼려한 우리나라의 수구파정부와 국제열강들은 합의하여 그를 다시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여론에 호소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활동과 외교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에의 헌신으로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하여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강의에 종사하고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였다.
8. 광복후 군정참여
1945년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에게 패하여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徐載弼博士自敍傳(金道泰編, 首善社, 1948)
獨立協會硏究(愼鏞廈, 一潮閣, 1976)
韓國開化思想硏究(李光麟, 一潮閣, 1979)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